INTERVIEW
파리에서 가야를 외친 김해김의 유려한 움직임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다. 김해김 (KIMHEKIM) 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실루엣과 소재는 그 말을 그대로 증명한다. 9년간 장인 정신과 집착에 가까운 탐구로 쌓아 올린 디테일, 그리고 시간과 경험이 녹아든 유려한 라인. 김해김의 대표 김인태는 단순히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입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비추는 조형가와도 같다.
이름으로 담은 정체성, ‘김해김’
김해김 대표 김인태
만나서 반갑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김인태만나서 반갑다. 김해김 대표 김인태다.
브랜드 네이밍이 익숙하면서도 독특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렉터는 많지만, 본관을 내건 디자이너는 거의 없지 않나. 어떻게 ‘김해김’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나?
김인태파리로 유학을 떠났을 때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 ‘김인태’라고 답하니, 다시 “그럼 성은 무엇이냐”라고 묻더라. 그제야 ‘김’이 성이고 ‘인태’가 이름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했다. 한국에서는 이름이 보통 세 글자라 자연스럽게 ‘김인태’로 통하지만, 해외에서는 성과 이름을 분리해 설명해야 하니까. 그때 장난처럼 “김해 김 가문의 김인태”라고 말했고, 유럽 브랜드들이 자신의 성을 브랜드 네임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 뿌리를 브랜드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김해 김씨’에는 금관가야의 유구한 역사와 장인정신, 장식 예술로 이어지는 전통의 맥락이 담겨 있지 않은가. 고대 가야의 금속 세공과 장식물처럼, 우리 브랜드 역시 섬세한 디테일과 아름다움을 쌓아 올리는 장식 예술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해 ‘김해김’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기 시작한 시점이 궁금하다. 그 출발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김인태스무 살 때였다. 처음엔 영어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는데, 한 달쯤 다녀보니 ‘아, 이건 전공이 아니라 모두가 가져야 하는 기본 역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 ‘정말 내가 잘하는 건 뭘까’라는 고민을 처음으로 깊게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어린 시절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인형에게 한복을 만들어 입히던 시간이 유난히 즐거웠달까. 그 감정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라서, ‘이걸 업으로 삼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부터 디자이너라는 꿈을 진지하게 품기 시작했다.
파리 패션위크를 앞두고 작업 중인 김인태 대표
에스모드 서울,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 스튜디오 베르소, 발렌시아가 컬렉션 팀 등 풍부한 커리어를 경험했다. 커리어 전개에 있어 가장 크게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김해김의 작업 방식과 철학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다고 느끼는지?
김인태파리에서의 10년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순간이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다. 파리에서 김해김을 론칭하고 바이어들에게 많은 오더를 받았는데, 생산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생산과 해외 수출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 과정이 브랜드의 구조를 제대로 잡아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파리에서 배운 감각과 구조적인 접근, 적합한 생산 환경을 경험한 것이 지금 김해김의 작업 방식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디자인과 생산, 브랜드 운영을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2016년부터 2025년까지 방대한 양의 디자인 스케치와 드로잉을 모았다
김해김은 파리부터 밀라노, 런던, 뉴욕까지 4대 패션 도시를 모두 사로잡았다. 해외 시장은 왜 김해김에게 열광한다고 생각하는가?
김인태감사하게도 ‘김해김’이라는 브랜드 네이밍 자체가 굉장히 한국적인데, 그 지점부터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여기에 파리에서 다져온 기반과 한국적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을 더하면서 독특한 매력이 생기는 것 같고. 이런 유니크함이 해외에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요소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전 세계적으로 대란을 일으킨 김해김 × 아식스 젤 님버스 10.1
9년 간의 디테일을 향한 끝없는 탐구
인터뷰하는 김인태 대표
지난 10월, 2026 파리 SS 패션위크로 전 세계가 뜨거웠다. 김해김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리는 글로벌 패션진출 프로젝트 ‘컨셉코리아 (Concept Korea)’ 에서 브랜드의 9주년을 기념한 ‘I Feel Love’ 컬렉션을 선보였다. 특별히 9주년을 기념한 이유가 있나? 왜 10년이 아닌, 9주년을 먼저 기념했는지?
김인태예전부터 10이라는 ‘완성된 숫자’보다 9라는 ‘채워지는 과정의 숫자’를 더 좋아했다. 뭔가 한 단계 남겨둔 상태에서 다음을 향해 움직이는 에너지 같은 게 있달까. 그래서 10주년을 정식으로 맞이하기 전에, 9주년을 통해 지금까지의 여정과 다가올 새로운 챕터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보고 싶었다.
김해김 26 SS ‘I FEEL LOVE’ 파리패션위크 런웨이
그렇게 들으니 10주년이 무척 기대된다.
김인태기대해도 좋다. 사실 이번 9주년은 말 그대로 10주년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한 단단한 반석 같은 단계다. 그간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확실하게 잡는 준비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내년에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스케일과 에너지를 담은 프로젝트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김해김 25 FW ‘L’atelier Kimhēkim’
무신사 엠프티 성수에서도 김해김의 9주년을 기념한 팝업을 선보였다. 이번 팝업에서 선보인 25 FW 아틀리에 컬렉션 역시 김해김만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데, 팝업과 컬렉션 소개를 직접 부탁한다.
김인태이번 25 FW 컬렉션은 ‘L’atelier Kimhēkim’이라는 타이틀 그대로, 지난 9년 동안 쌓아온 김해김의 실루엣과 디테일을 내가 사랑하는 소재들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브랜드의 뿌리를 이룬 요소들을 정교하게 정리해 하나의 ‘아틀리에적 세계’로 보여주는 느낌에 가깝다.
무신사 엠프티 성수에서 진행한 김해김 팝업
특히 팝업 공간에는 김해김 아틀리에를 상징하는 오브제 중 하나인 스토크만 마네킹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제작해 설치했다. 9년 동안 늘 옆에서 창작을 함께한 친구 같은 존재라, 이번 팝업에서는 그 오브제가 김해김을 상징하는 하나의 조형물로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김해김의 작업실에 초대된 듯한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달까.
스토크만 마네킹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25 FW 컬렉션
그럼 이번 컬렉션 제품 중에 딱 한 가지 추천한다면?
김해김‘스토크만 캐시미어 재킷’을 꼽고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틀리에의 스토크만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작품인데, 캐시미어 소재로 완성해 굉장히 가볍고 우아한 실루엣이 특징이다. 군더더기 없는 컷이라 입었을 때 라인과 핏이 정말 아름답게 떨어진다. 이번 컬렉션의 정수를 담은 아이템이라 꼭 한번 직접 착용해 보길 추천한다.
김해김 25 FW 스토크만 캐시미어 재킷
김해김 25 FW 스토크만 캐시미어 재킷 디테일
팝업 스토어가 성수라는 점도 놀랍다. 조금 더 전통적인 지역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왜 성수동에 위치한 무신사 엠프티를 택했나?
김인태지금 서울에서 가장 활발하게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는 곳이 성수동 아닌가. 해외에서 오는 손님들도 꼭 들르는 지역이고, 다양한 브랜드와 크리에이터가 한데 모이는 지점이라 김해김과도 좋은 시너지가 날 것으로 확신했다.
무신사 엠프티 성수에서 진행한 김해김 팝업 현장 모습
무신사 엠프티는 접근성이 좋은 만큼 새로운 고객층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번 팝업을 통해 김해김이 앞으로 더 확장하고자 하는 방향성 또는 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고객층이 있다면 듣고 싶다.
김인태무신사 엠프티 성수를 찾는 분들은 패션은 물론이고 아트와 창작 전반에 관심이 깊은 분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아트를 사랑하는 브랜드’라는 김해김의 정체성과 잘 맞닿아 있다. 앞으로 김해김은 하나의 연령대를 타게팅하기보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이번 팝업 역시 그 첫 관문이 되는 자리였으면 하고.
2021년 컬렉션부터 하나의 미적 요소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Obsession (집착)’ 시리즈를 전개하고 있다. 장미, 캔버스, 리본, 진주 등 하나의 디테일을 치밀하게 탐구해 온 셈이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컬렉션은 무엇인가?
김인태Obsession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건 N°6 ‘Hymne à la Perle’, 진주에 대한 애착을 풀어낸 컬렉션이다. 무대에서 진주가 터지는 퍼포먼스로도 많은 분들이 기억해 주시는데, 그만큼 김해김이 가진 ‘진주’라는 소재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작업이었다. 진주는 우연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 예측할 수 없는 결의 매력을 패션으로 찬가처럼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컬렉션이다.
김해김 Obsession N°6 ‘Hymne à la Perle’
언급한 23 FW 진주 커팅 퍼포먼스처럼 김해김의 쇼는 뇌리에 박히는 강렬한 에너지로 유명하다. 매 시즌 관객의 감각을 사로잡는 힘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나?
김인태그 힘은 결국 창작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3 FW의 진주 커팅 퍼포먼스 역시 아틀리에에서 실제로 진주 피스를 만들다가, 작업 중간중간 진주가 ‘톡’하고 터지는 순간마다 팀 전체가 웃고 환호하던 기억에서 출발했다. 그 생생한 에너지와 즐거움이 자연스럽게 쇼의 아이디어가 된 셈이다. 그래서 쇼를 구성할 때 놓치지 않으려는 포인트는 언제나 같다. 작업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진짜로 느꼈던 감정, 즉 짜릿함, 재미, 우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전달하는 일. 그 진정성이 관객의 감각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힘이 된다고 믿는다.
진주를 커팅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안 그래도 이번 26 SS 쇼에서도 피날레에서 인사하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과 즐거움이 보는 사람까지 전해져 기분이 좋아지더라. 그 순간의 감정은 어땠나?
김인태사실 피날레에 설 때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같다. 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해야지 하는 생각. 그런데 막상 쇼가 끝나고 그 순간이 딱 찾아오면, 감사해야 한다는 의지도 잠시 잊힐 만큼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진다. 준비 과정의 긴장과 에너지가 한 번에 빠져나가면서, 설명할 수 없는 순도 높은 즐거움과 행복감만 남는다. 아마 그 감정이 무대 밖으로도 자연스럽게 전달된 게 아닐까 싶다.
이번 컬렉션에선 약 10년에 가까운 김해김의 장인정신에 대한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김해김이 정의하는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김인태앞서 이야기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진정한 장인정신은 단순히 완성도를 높이는 기술이나 결과물에만 있지 않다. 과정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고, 그 안에서 나다움을 미세하게 쌓아 올리는 행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결정체가 된다. 그 축적된 시간과 태도, 그리고 즐김이 바로 김해김이 말하는 장인정신이다.
김인태가 말하는 창작의 순간들
인터뷰하는 김인태 대표
아침은 하루를 천천히 깨우고,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본인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다.
김인태사실 다소 유행이 지난 것 같지만, (웃음) 요즘은 바디 프로필 준비를 하고 있어서 운동과 함께 단백질 가득한 식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을 준비하면서 신나는 재즈 음악을 틀어놓으면, 그 순간이 하루를 여는 나만의 루틴이자 즐거움이다.
제78회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정유미 작가의 단편영화 <안경>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다. 다른 패션 브랜드가 아닌 애니메이션과 협업을 진행하는 점이 신선했는데, 애니메이션과 협업을 시도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김인태학창 시절 파리에서 공부할 때, 정유미 작가님의 작품 <러브 게임> 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언젠가 함께 협업해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을 했고, 김해김이라는 브랜드를 전개하면서 이를 정유미 작가님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협업을 제안했다. 작가님께서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함께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고, 덕분에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 애니메이션 부문에 초청받은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작품성이 좋았던 거 아닐까.
김인태정말 잘 만들어 주셨고, 내게도 굉장히 소중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취향을 이야기할 때 영화만큼 효과적인 매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오래도록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면 무엇일까?
김인태<포레스트 검프>. 불편한 다리를 가진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기와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이야기가 큰 울림을 준다. 인생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공상가, 혹은 창작을 향한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영화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김해김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늘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지만, 김해김만의 본질은 여전히 선명하다. 다가오는 새로운 도전에 대해 살짝 스포일러를 해준다면?
김인태앞으로의 도전은 세계 각 도시에 김해김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하나씩 여는 것이다. 청담 플래그십을 중심으로, 어디에서든 김해김의 철학과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인태패션이라는 장식 예술의 영역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배가된다는 점이다. 김해김이 그런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었으면 하고, 입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풍요롭게 만드는 브랜드로 기억되길 바란다.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김해김
9년의 세월을 보내며 자신만의 결을 구축해 온 김인태. 그의 손끝은 여전히 디테일을 한 겹씩 쌓아 올리며 완성도를 높이고,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은 그 과정에서 조용히 드러난다. 그렇게 김해김의 세계는 10년의 지평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천천히 넓어지고 있다.
에디터 : 박다원, 임가현 | 포토그래퍼 : 박유주 | 디자이너 : 고승연 | 인터뷰이 : 김인태 | 자료 제공 : 김해김
‘인터뷰’는 무신사 에디터가 만난 영향력 있는 패션 피플의 인터뷰를 다룬 콘텐츠입니다.


